맛집 블로그 포스트를 알고리즘 문제처럼 쓰는 남자, 우리의 엔지니어가 기말고사를 보러간 관계로 오늘은 제가 백준님을 끌고 파스타집으로 갔습니다. 제가 일주일 전부터 파스타 파스타 노래를 불렀는데, 드디어 소원 성취를 했군요.
간판이 귀여운 베이지 가든.
인근 식당은 모두 ‘서강 고등학교’의 분위기인데, 여기만은 상수동 같다.
스타트링크 회사가 위치한 르호봇 신촌 센터 바로 옆 건물에는 근처 밥집이나 고깃집과는 전혀 다른 오오라를 내뿜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베이지 가든이 있습니다.
카페인 1층을 지나 계단으로 올라가면 화덕이 있는 주방과,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비추는 테이블이 놓여 있습니다. 마치 썸남 썸녀가 와서 마주앉아 지긋이 서로의 눈을 바라볼 것만 같은 분위기인데요.. 우린 시험공부 하다가 넥슨 후드를 뒤집어 쓰고 온 여자 1, 이 추운 겨울날 패딩 안에 반팔 하나 입고 온 남자 1, 방금까지 FFT 같은 걸 구글 시트에 채워넣으며 알고리즘 태깅하다 온 여자 1의 구성으로 이곳의 한 구석을 어두침침하게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명이 아름다워서인지 모두 예쁘고 잘생겨보이는 효과가…^^;;
“와 오빠 꽃이 정말 예뻐요!” “훗, 내 눈에 네가 더 예쁜걸..”
이런 대화가 오갈 것만 같은 분위기. 그런 거 없다
메뉴는 간단히 샐러드, 피자, 파스타, 와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왔을 때보다 스테이크니 불고기 피자롤이니 하는 것들이 더 생기면서 점점 다양해져 가고 있는 것 같네요.
가격이 비싼 듯 아닌 듯 쪼오금 비싸지만, 저녁은 회사 제공이므로
가격은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늘의 메뉴는 포르마지 피자, 만조 풍기와 화덕 파스타! 사실 너무 굶주린 채 가서, 뽀모도로까지 시켜 1인 1파스타에 피자까지 먹으려고 했지만 사장님께서 깜짝 놀라시며 우리를 말렸습니다. ‘사장님이 우리의 위를 과소평가 하고 계셔!’라고 생각했지만 다 먹고 난 후 사장님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음. 여러분, 이래서 굶주린 채 마트에 가거나 음식 주문을 하면 안됩니다. (?)
기다리는 동안 식기가 세팅되었습니다. 원목 탁자와 정말 잘 어울리는 아기자기한 그릇들. 사장님의 취향이 여기저기 묻어나오는 소품입니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드라이플라워 책장이라든가, 샹들리에에까지 둘러져있는 플라워 리스, 전체 분위기와 어울리는 원목 걸상에 엔틱한 소품들. 어쩐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너무 많아요! 메뉴 두고 갈테니 모자라면 중간에 시키는 게 어떤가요?’ 하며 우리를 말리던 소녀소녀한 사장님을 닮은 가게인 것 같군요.
조금 기다리니 이탈리안 드레싱에 발사믹 식초를 조금 뿌리고, 그 위에 신선한 치즈를 갈아넣은 샐러드가 나왔습니다. 블로깅에 익숙치 않은 저는 포크부터 집어들었다가 아차 하고 다시 카메라를 들었군요. 포크에 양껏 찍어 입에 넣으니 새콤한 드레싱과 발사믹의 맛과 아삭아삭한 양상추, 방금 갈아 넣은 파마산 치즈의 고소함이 한데 어우러지며 신선한 샐러드의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맛있는 샐러드가 서비스라니!
드디어 등장한 파스타. 뽀얀 크림에 양송이와 소고기 안심이 푸짐하게 들어있는 만조 풍기와, 매콤새콤한 토마토 소스에 한껏 올려진 모짜렐라 사이로 탱글탱글한 새우가 빼꼼 고개를 내민 화덕 파스타입니다. 매콤한 토마토 소스 파스타가 정말 먹고 싶었던 저는 화덕 파스타부터 공략!
큼직한 새우가 보이시나요. 사실 저는 호주 교환학생 시절, 일주일에 파스타를 열 네 번씩 먹었기 때문에 웬만해선 파스타가 맛있다고 하질 않습니다. 흡..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살인적인 호주 물가에 항상 돈이 모자랐기 때문에, 마트에서 한 봉지 1달러 하는 파스타는 저의 좋은 영양 공급원이었죠. 그 때 단련된 마리나라 소스 만드는 실력은 지금도 웬만한 파스타 집 뺨을 후려친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여기의 마리나라 소스는 제 취향에 딱이더군요. 토마토소스에 바질향이 듬뿍 나면서, 여기에 감칠맛을 더해주는 은은한 마늘향과 혓바닥을 자극하는 적절한 매운 맛까지! 고소한 모짜렐라 치즈와 함께 파스타 면을 포크에 둘둘 감고, 마지막으로 새우까지 콕 찍어 입에 넣으면 오늘 저를 괴롭히던 random variable들과 르벡 적분이 머릿속에서 싹 잊혀지는 것 같습니다. 내일 시험 봐야하는데 잊으면 어떡해?!
뽀얀 자태 자랑하는 크림 파스타. 베이지 가든의 크림파스타는 생크림의 묵직하고 풍부한 맛 보다는, 우유의 산뜻하고 고소한 맛이 더 강조된 부담없는 맛입니다. 버섯의 향이 소스에 스며들어 있어, 가볍지 않고 고소하면서 향긋한 맛이 나는 크림파스타였습니다. 사실 저는 정신없이 오븐 파스타를 먹고 나니 이미 파스타도 많이 줄어있고, 안심은 온데간데 없어서 맛보지 못했습니다. 흑흑… 하지만 백준님의 말로는, 여기 크림 파스타 최고! 라고 하는군요.
파스타를 절반쯤 먹자 포르마지가 나왔습니다. 포르마지는 네 가지 치즈를 얹은 치즈 피자의 끝판왕인데요, 요 피자에는 고르곤졸라, 파다노, 모짜렐라, 크림치즈가 들어있습니다. 따끈할 때 집어 달콤한 꿀을 듬뿍 적시고 한 입 베어물면 먼저 고르곤졸라의 치즈향과 파다노의 풍미가 느껴지면서, 쫀득하고 고소한 모짜렐라에 마지막으로 부드럽고 새콤한 크림치즈의 맛이 느껴졌습니다! 화덕에서 잘 구운 바삭한 도우에 치즈만 올려진 이 피자는 정말이지 치즈덕후인 저를 설레게 했답니다.
돈키호테의 작가인 세르반데스는 ‘빵만 있다면 웬만한 슬픔은 견딜 수 있다’고 했다는데, 오늘 저는 맛있는 파스타와 피자가 있기에 밤샘 벼락치기를 견딜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
앞으로도 펼쳐질 화려한 스타트링크의 저녁 탐방기 기다려주세요!